엔지니어링 시뮬레이션과 블록체인
현실을 모사하고 신뢰를 더하다
우리는 이제 제품을 설계하고 만들기 전에, 컴퓨터 안에서 가상의 시험대를 돌린다. ‘엔지니어링 시뮬레이션’이라 불리는 이 기술은 자동차의 충돌 실험부터 항공기의 공기역학, 스마트폰 내부의 열 분포까지 미리 예측하게 해준다. 이 과정에서의 시간 단축과 비용 절감은 산업 전체의 경쟁력을 좌우한다.
하지만 이 시뮬레이션 결과, 즉 ‘디지털 근거’들은 과연 어디까지 신뢰할 수 있을까? 데이터의 무결성과 정합성을 보장하지 않으면, 설계 오류는 여전히 제품 결함으로 이어진다. 이 지점에서 등장하는 기술이 바로 블록체인이다. 예측과 신뢰가 만나는 지점, 그 가능성과 도전을 살펴보자.
1. 엔지니어링 시뮬레이션 기술의 현재: 정밀도와 자동화의 진화
CAE는 이제 단순한 도구가 아니다
전통적인 CAE(Computer-Aided Engineering)는 FEM(유한요소해석), CFD(유체역학 해석), MBD(다물체 동역학) 등 전문 해석기술을 중심으로 발전해왔다. 그러나 지금은 단순히 설계 결과를 평가하는 것을 넘어, 초기 설계 단계부터 해석 데이터 기반의 피드백 루프가 자동화되고 있다. 엔지니어들은 더 이상 직관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데이터 기반 시뮬레이션이 설계를 끌고 간다.
참고로 여기에 검증을 위하여 더해지는 해지는 분야가 CAT(Computer Aided Testing)이다.
AI의 접목: 자동화된 해석과 예측 모델
최근 몇 년간 급격히 도입된 인공지능 기술은 시뮬레이션의 해석 속도를 획기적으로 향상시켰다. 예를 들어, 딥러닝 기반의 서로 다른 형상의 학습 모델은 복잡한 구조물의 강도 해석을 실시간에 가깝게 예측할 수 있게 했다. 과거 12시간 걸리던 고해상도 열전달 해석이, AI를 활용하면 1분 만에 결과를 도출할 수 있다.
클라우드 기반 협업: 시뮬레이션의 분산화
시뮬레이션은 더 이상 개인 워크스테이션에만 갇혀 있지 않다. 클라우드 CAE 플랫폼이 보편화되며, 여러 엔지니어가 동시에 한 설계에 대해 각기 다른 물리 해석을 수행하고 그 결과를 통합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제품 개발 프로세스의 병목을 줄이고, 설계 변경에 빠르게 대응할 수 있는 유연성을 제공한다.
2. 시뮬레이션 데이터의 딜레마: 검증과 신뢰
‘누가 이 데이터를 만들었는가’에 대한 의문
시뮬레이션 데이터는 수많은 입력 변수와 해석 조건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동일한 모델이라도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다. 이 때문에 데이터 위조나 조작의 가능성이 항상 존재한다. 특히 협력사 또는 외주 파트너와 데이터를 공유할 경우, 누가 어떤 조건으로 시뮬레이션을 수행했는지를 명확히 기록하고 검증할 수 있어야 한다.
블록체인의 등장: 변경 불가능한 해석 로그
블록체인은 데이터를 블록에 담아 체인으로 연결하고, 변경이 불가능한 방식으로 저장한다. 이를 시뮬레이션에 적용하면, 모든 해석 이력(버전, 조건, 파라미터)이 자동으로 기록되고, 제3자가 해당 로그를 검증할 수 있다. 예컨대 자동차 부품 개발 시, OEM이 협력사의 시뮬레이션 결과를 블록체인 기반으로 검토하고, 법적 책임 분배 근거로 사용할 수도 있다.
3. 블록체인 기반 시뮬레이션 : 적용 사례와 과제
디지털 신뢰 인프라의 구축
독일의 지멘스와 다쏘 시스템즈는 제조업의 디지털 전환에 있어 블록체인을 시뮬레이션 신뢰 인프라로 적극 도입하고 있다. 특히 항공기 부품의 인증 과정에서, 해석 결과와 시험 결과의 이력을 완전하게 기록하고 추적 가능한 체계를 만들고 있다.
스마트 계약의 가능성
블록체인 기반의 스마트 계약(Smart Contract) 기술을 활용하면, 일정 해석 조건을 충족할 경우 자동으로 다음 개발 단계가 승인되도록 만들 수 있다. 예를 들어, 피로 해석 결과가 일정 수치 이상이면 자동으로 CAD 데이터가 설계 승인을 받고 BOM이 생성되는 구조가 가능해진다.
현실의 장벽: 속도, 저장비용, 표준화
그러나 모든 시뮬레이션 데이터를 블록체인에 올리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해석 파일은 수 GB~TB에 달하며, 처리 속도나 저장비용이 현재의 블록체인 기술로는 부담이다. 이에 따라 요약 정보(Metadata)만 블록체인에 기록하고, 원본 파일은 외부 저장소에 두는 하이브리드 구조가 제안되고 있다.
4. 미래 전망: 설계와 신뢰가 자동화되는 세계
디지털 트윈과 블록체인의 융합
디지털 트윈(Digital Twin)은 현실의 기계나 공정을 디지털로 복제한 것이다. 또한 디지털트윈은 단순히 형상만이 아닌 실제 물리적인 엔지니어링 데이터를 내포하고 있어야 진정한 디지털 트윈이다. 이렇게 생성되는 시뮬레이션 데이터가 블록체인에 의해 신뢰를 확보하면, 제품 수명 전체에 걸쳐 상태를 예측하고 관리하는 체계가 가능해진다. 이것은 곧 제품의 자율관리, 예측 유지보수, 사후 분쟁 대응까지 이어질 것이다.
규제와 표준의 변화
앞으로 각국의 기술 규제기관은 제품 인증 시 단순 시험결과뿐 아니라 블록체인 기반 시뮬레이션 이력을 요구할 가능성이 크다. 이는 인증 과정의 디지털 전환을 가속화하고, 제품 개발의 객관성과 공정성을 보장하는 수단이 될 것이다.
CAE 전문가의 역할 변화
전통적으로 해석전문가는 시뮬레이션 자체에 집중해왔다. 그러나 이제는 데이터 정합성, 보안, 검증기록 관리까지 이해하고 다루어야 한다. 블록체인은 기술이 아니라, 새로운 해석 문화와 업무 방식의 패러다임이 된다.
5. 시뮬레이션과 신뢰가 공존하는 설계의 미래
엔지니어링 시뮬레이션은 예측의 기술이고, 블록체인은 신뢰의 기술이다. 이 두 가지가 만났을 때, 우리는 단순히 더 빠르고 정확한 제품 개발을 넘어서, 책임 있고 투명한 기술 문화를 만들어 갈 수 있다.
기계가 점점 더 복잡해지는 시대에, 우리는 그 복잡함을 예측하는 도구뿐 아니라, 그 예측을 신뢰할 수 있는 증거의 체계가 필요하다. 블록체인은 바로 그 열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