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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체인의 나, 오프체인의 나”

“온체인의 나, 오프체인의 나”

 

누군가 내게 물었다. "너는 누구인가?" 그 질문에 나는 망설였다. 내 주민등록번호를 대야 하나, 소셜미디어 프로필을 보여줘야 하나. 아니면 이더리움 지갑 주소를 건네야 할까. 지금 우리는 복수의 세계에 살고 있다. 하나는 물리적 현실에 기반한 '오프체인' 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블록체인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 안에서 작동하는 '온체인' 세계다.

이 두 세계는 점점 더 얽히고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암호화폐, 참여하는 DAO(탈중앙화 자율조직), 구매한 NFT, 스테이킹한 자산, 모두 '온체인' 상의 나를 만든다. 반면, 내가 오늘 무얼 먹었는지, 어디서 일하고 있는지, 누굴 만나는지는 여전히 '오프체인'에 남는다. 이 두 정체성은 어떻게 다른가? 그리고 언젠가 이 둘은 하나로 융합될 수 있을까?

1. 정체성이 나뉜다는 것

디지털 시대, 우리는 이미 여러 개의 정체성을 갖고 살아간다. 회사원으로서의 나, SNS에서의 나, 그리고 게임 속 캐릭터로 살아가는 나. 그런데 Web3, 특히 블록체인의 등장으로 이 분열은 훨씬 더 뚜렷해졌다. 지갑 주소 하나로 활동하는 "온체인의 나"와 현실 세계에서의 법적 존재인 "오프체인의 나"는 때로 연결되고, 때로 완전히 분리되어 존재한다.

 

2. 온체인의 나 : 지갑 주소로 살아가기

블록체인에서 개인은 이름이나 얼굴이 아닌 지갑 주소로 존재한다. 이것은 단순한 식별 수단이 아니다. 그 주소는 내가 어떤 NFT를 보유했는지, 어떤 DAO에 참여했는지, 얼마나 많은 토큰을 스테이킹했는지 모두를 보여주는 일종의 공개된 정체성 기록이다.
하지만 이 기록은 완전히 익명적이기도 하다. 주소와 사람 사이에 직접적인 연결고리가 없다면, 누군가가 누구인지 알아내는 것은 쉽지 않다.

여기서 흥미로운 건, 내가 나를 '증명'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신원은 선택 사항이며, 프라이버시가 우선시된다. 지갑은 익명일 수 있지만, 그 행동은 불변하며 공개적이다. 이 역설적인 구조는 새로운 사회적 인간상을 제안한다. 윤리적이되 익명이고, 책임이 존재하지만 얼굴은 없다. 즉, 정체성은 '본질'이 아니라 '행동'에 의해 정의된다.

 

3. 오프체인의 나 : 실명과 얼굴, 제도 속의 존재

반면 오프체인의 나는 여전히 주민등록번호, 여권, 실명 계좌를 통해 사회와 관계 맺는다. 이 정체성은 제도적이고, 법적 책임을 동반한다. 은행, 학교, 병원, 정부 서비스 등 실생활 대부분은 오프체인 정체성을 기준으로 움직인다.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부여받는 정체성은 국가, 문화, 가족, 직장, 친구, 성별, 학력, 경제력 등 수많은 기준에 따라 규정된다. 이 정체성은 사회적 관계 안에서 형성되고, 유지되며, 때로는 억압된다. "너는 한국인이니까", "여성이니까", "이 나이에 이걸 한다고?"와 같은 규범들이 오프체인 세계의 견고한 벽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이 정체성은 바꾸기 어렵다는 점이다. 실수를 하면 오랫동안 낙인이 찍히고, 제도를 통해 통제받는다. 익명은 허용되지 않으며, 모든 것이 '실명제'와 '실체적 증거' 위에 존재한다.

 

 

4. 분리된 나, 충돌하는 윤리

온체인의 나와 오프체인의 나는 때때로 서로 다른 도덕과 규범을 따른다. 예를 들어, 어떤 이는 온체인에서는 투명하게 DAO에서 투표하며 공익을 주장하지만, 오프체인에서는 노동 착취 기업에 근무할 수도 있다.
정체성이 분리되면 윤리적 책임의 모호성이 발생한다. “지갑 주소의 나”는 법적으로 처벌받을 수 없기 때문에, 사기나 해킹에 대한 처벌도 오프체인에서만 이뤄진다. 이로 인해 ‘정체성의 도피처’로 블록체인이 이용되기도 한다.

 

5. 현실의 나로 연결되는 탈중앙화 사회

그렇다고 이 둘이 영원히 분리될 수는 없다. 이미 수많은 Web3 프로젝트들이 KYC(실명 확인)를 요구하고 있으며, 탈중앙화 신원인증(DID) 기술을 통해 오프체인 정보를 온체인에서 증명하는 방식이 확산되고 있다.
예를 들어, 대학 졸업장을 NFT로 발급하거나, 특정 병원의 진단서를 지갑에 저장하는 식이다. 이는 블록체인 기반의 ‘현실 정체성 확장’ 실험이다.

 

6. 블록체인 기반 신원 인증(DID)의 현재

DID(Decentralized Identity)는 사용자가 자신의 신원을 직접 통제하는 방식의 인증이다. 블록체인 위에서 돌아가며, 어떤 기업이나 정부도 그 정보를 조작하거나 통제할 수 없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Polygon ID], [Microsoft의 ION], [Veramo] 같은 DID 프레임워크들이 있다.
이런 시스템은 취약 계층의 신원 보장, 국경 없는 금융 참여 등에 활용될 수 있다.

 

7. 정체성 융합의 실험들

몇몇 프로젝트들은 이미 온체인과 오프체인의 경계를 허무는 실험을 하고 있다.

  • 개발자의 오프체인 경력과 온체인 활동을 연결하여 ‘신뢰 점수’를 만드는 형태.
  • 온체인 소셜그래프를 통해 개인의 디지털 평판을 구축하는 형태
  • 양도할 수 없는 디지털 신분증과 같은 역할을 하는 형태 등
    이는 ‘온체인의 나’를 단순한 주소가 아니라, 사회적 맥락을 가진 존재로 진화시키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8. 사회적 쟁점 : 프라이버시인가, 책임인가

하지만 정체성 융합은 프라이버시 침해와 맞닿아 있다. “블록체인은 영원히 기록된다”는 속성은 개인의 민감한 정보까지 영구히 남길 수 있다.
반대로, 온체인 활동이 너무 익명적일 경우 책임이 사라진다. 이것이 사기, 범죄, 조작적 투표 등을 부추긴다는 지적도 있다. 결국, 익명성과 책임감 사이의 균형이 가장 중요한 과제다.

 

9. 미래 전망 : 새로운 ‘나’를 설계한다

앞으로의 디지털 사회에서는 정체성이 더 복잡해질 것이다. 한 사람은 여러 개의 지갑을 가지고, 각각 다른 역할을 맡아 활동할 수 있다. 블록체인 기반의 다중 정체성(Multiple Identity)은 마치 온라인 게임 속 캐릭터처럼 선택 가능한 나로 진화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제 ‘정체성’이라는 개념을 단일한 실체가 아니라, 복수의 서사와 역할이 공존하는 집합체로 이해해야 한다.

 

10. 정체성의 확장인가, 분열인가

“온체인의 나와 오프체인의 나는 같은 사람일까?” 이 질문은 단지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라 철학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는 정체성을 ‘증명’하는 시대에서, 정체성을 스스로 설계하고 선택하는 시대로 넘어가고 있다. 그 안에서 윤리, 프라이버시, 사회적 책임이라는 문제들이 어떻게 해소될지 주목해야 한다.
결국, 이 분리와 융합의 과정은 단순한 기술 진보가 아니라 인간의 존재 방식의 전환이다.

분명한 건, 이제 '나'는 하나의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여러 정체성이 공존하고 흐름 속에서 정의되는 존재가 되었다는 점이다. 온체인의 나와 오프체인의 나는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보완하며 확장하는 또 다른 ‘나’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