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왜 ‘온체인 이직’인가?
“구직자 A는 이직을 준비하며 링크드인에 화려한 경력을 써두었다. 그러나 입사 전날, 채용담당자는 ‘이게 진짜인지 어떻게 믿을 수 있죠?’라는 질문을 던졌다.”
기술과 네트워크의 진화 속도에 비해, 이력 검증 방식은 여전히 구식이다. 여전히 우리는 구글 문서나 PDF 포맷의 이력서를 이메일로 보내고, 학위나 경력을 증명하는 서류를 일일이 수작업으로 확인받아야 한다. 하지만 만약 내 이력과 기술 스택, 프로젝트 기록이 블록체인 위에 투명하고 위변조 불가능한 방식으로 저장된다면? 이직 과정은 훨씬 더 투명하고 간결해질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온체인 이직(온체인 커리어)’의 핵심이다. 탈중앙화된 블록체인 기술은 이제 커리어 관리와 이직의 패러다임을 바꾸기 시작했다.
2. 온체인 이력서와 포트폴리오 DAO란?
온체인 이력서는 이름 그대로, 이력과 활동 내역을 블록체인 상에 기록한 형태의 이력서다. 기존의 문서 중심 이력서와 달리, 주요 활동 기록(교육 수료, 프로젝트 기여, 기고, 해커톤 수상 등)을 DID(Decentralized Identity) 기반의 지갑 주소와 연결해 인증할 수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가 등장한 개념이 포트폴리오 DAO다. 이는 구직자 개인의 기술력과 기여도를 중심으로 조직된 탈중앙화된 집단으로, 여러 개발자나 디자이너, 기획자들이 DAO의 일원으로서 공동 포트폴리오를 만들고, 거버넌스를 통해 역량을 인증받는 방식이다.
이 DAO의 구성원은 스마트 컨트랙트를 통해 기여 내역을 자동 기록하며, 결과적으로 경력=기여 내역=온체인 증거로 이어진다. 일종의 ‘경력 기반 DAO’다.
3. 실제 사례 : TalentLayer와 Buildspace
온체인 커리어의 흐름은 아직 초기이고 실험적이지만, 전 세계적으로 몇 가지 주목할 만한 시도가 있다.
- TalentLayer : 프리랜서와 기고자, 개발자들이 자신의 작업 내역을 온체인에 기록하고, 다오 기반으로 포트폴리오를 형성할 수 있는 플랫폼이다. 채용 기업은 이 스마트 계약 기반의 이력 데이터를 활용해 지원자의 기술 이력을 자동 검증할 수 있다.
- Buildspace : 웹3 학습 및 프로젝트 플랫폼으로, 수료한 사람은 고유한 NFT 인증서를 발급받고, 해당 기록이 블록체인에 저장된다. 이를 통해 참여자는 “나는 이런 프로젝트를 완료했음”을 온체인으로 증명할 수 있다.
- Gitcoin & Quest3: 커뮤니티 참여 기반의 과제 수행, 해커톤 등의 이력을 NFT 형태로 기록해 참여도와 기여도를 시각화해 보여주는 서비스도 있다. 나의 해커톤 우승 경력은 더 이상 블로그 캡처가 아니라 온체인 기록으로 대체된다.
4. 기존 HR 시스템의 한계와 대안
현행 HR 시스템은 중앙화된 데이터베이스에 기반하고, 서면이나 면담을 통해 이력의 진위를 파악한다. 이 과정은 시간도 오래 걸리고, 허위 기재나 과장 표현이 난무하는 구조적 문제를 낳는다. 온체인 기반 시스템은 이 과정을 대체할 수 있다.
- 투명성 확보: 실제 수료/참여 여부를 블록체인으로 검증.
- 자동화된 이력 수집: GitHub 커밋, DAO 활동, 보상 기록 등이 자동 연동.
- 검증 비용 절감: 레퍼런스 체크, 서류 요청 등의 수작업 최소화.
즉, 신뢰기반의 커리어 관리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5. 온체인 이직의 미래 : 가능성과 과제
온체인 이직이 모든 이직자 및 구직자에게 당장 실현 가능한 건 아니다. 아직 대기업 HR은 보수적이고, 웹3 생태계 자체도 초기다. 그러나 몇 가지 방향성은 분명하다.
- 웹3 기반 채용 생태계 확장: DAO 채용, NFT 인증, 온체인 기여 추적.
- 기술 스택의 분화: 분산 ID 저장 방식 다양화.
- 프라이버시 이슈: 일부 정보는 선택적 공개로, ZK 기술 도입 필요.
결국, 온체인 이직은 단순한 경력 저장의 진화를 넘어, 개인이 자기 경력을 직접 소유하고 통제할 수 있는 주권적 커리어 구조로 진화할 가능성이 크다. 구직의 미래는 중앙의 승인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직접 만든 신뢰의 증명체계를 기반으로 연결되는 세상이 될 것이다.
6. ‘일’의 의미와 정체성을 묻다 : 온체인 시대의 노동자
우리는 지금, '이력서'와 '경력'이 단순히 직장을 얻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자기 서사의 일부가 되어가는 전환점에 서 있다. 온체인 이력서의 등장은 단순한 기술 혁신이 아니라, ‘우리는 누구이며, 왜 일하는가’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가능하게 하는 새로운 사회적 실험이라고 할 수 있다.
근대 사회에서 ‘일’은 소속과 생계의 수단이었으며, 이력서는 그 틀 안에서의 통제된 증명이었다. 하지만 블록체인 기반의 온체인 이력서는 그 틀을 해체한다. 누구나 자신의 작업 이력, 협업 경험, 프로젝트 기여도를 공공의 기록에 투명하게 남기고, 그것이 하나의 디지털 정체성이 되고 있다. 이 디지털 정체성은 단순히 HR 데이터가 아니라, 개인이 어떤 가치를 추구하며 누구와 함께 성장해 왔는지를 증명하는 ‘관계의 역사’이기도 하다.
이는 곧 고용의 패러다임을 바꾸기에 충분하다. 고용주는 이력서가 아니라 프로토콜 상의 신뢰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사람을 찾게 되며, 구직자는 더 이상 한 장짜리 문서가 아니라, 오픈소스와 DAO를 통해 축적된 실질적 기여와 평판으로 평게 된다. 이런 구조 속에서 노동은 중앙화된 시스템의 통제 아래 놓이지 않고, 개개인의 주체성과 선택 속에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단지 기술의 진보가 아니라, 노동의 존엄성과 인간관계의 방식에 대한 재구성이라고 할 수 있다. 블록체인은 익명성과 투명성을 동시에 허용하면서, 오히려 사람 사이의 ‘신뢰’와 ‘책임’이라는 전통적 가치들을 디지털 세계의 새로운 언어로 번역해 낸다. 아직은 실험 단계일 수 있고, 제도적 장치는 부족하지만, 이러한 흐름은 분명히 우리에게 질문한다.
“기록되지 않은 일은 존재하는가?”
“누가 나의 노동을 평가하며, 나는 누구와 함께 일하고 싶은가?”
온체인 이력서의 시대는 바로 이 질문에서 시작된다. 더 이상 중앙 서버에 갇힌 경력이 아닌, 나의 손으로 보존하고 공유하는 경력. 탈중앙화된 사회는 결국, 중앙이 아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결’로 만들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 연결 위에, 우리는 새로운 방식의 ‘일’과 ‘나’를 만들어 가고 있는 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