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체인 기술의 다음 단계로 꼽히는 동형 암호(Homomorphic Encryption, HE)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블록체인은 투명성을 기반으로 한 탈중앙화 기술이다. 모든 거래 내역과 데이터는 누구나 볼 수 있다. 이는 금융 시스템의 신뢰를 구축하는 데는 필수적이지만, 의료 정보, 개인 신용 데이터와 같은 민감한 정보를 다룰 때는 심각한 프라이버시 문제를 야기한다. 동형 암호는 이러한 딜레마를 해결하고, 데이터를 암호화된 상태 그대로 연산할 수 있는 혁신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이 글을 통해 동형 암호의 원리가 무엇인지, 왜 블록체인에 필수적인 기술인지, 그리고 두 기술이 결합하여 어떻게 데이터 프라이버시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갈지 기술적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1. 블록체인의 투명성 딜레마: 공개와 비공개 사이
블록체인의 가장 큰 장점은 '투명성'이다. 모든 참여자는 블록체인에 기록된 모든 거래와 데이터에 접근하고 검증할 수 있다. 이는 해킹이나 데이터 조작을 원천적으로 막는 강력한 보안 메커니즘이다.
하지만 이 투명성은 양날의 검이다.
- 금융 정보: 비트코인이나 이더리움은 모든 거래 금액과 주소가 공개되어 있다. 이는 사용자의 익명성을 보장하지만, 동시에 모든 거래 내역이 특정 개인과 연결되면 개인의 금융 활동이 모두 노출될 수 있다.
- 민감 정보: 의료 데이터, 개인 신용 점수, 기업 기밀 등 민감한 정보를 블록체인에 기록해야 할 때, 이 데이터가 모두에게 공개되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블록체인의 투명성이라는 가치가 오히려 개인 정보 보호를 침해하는 딜레마에 빠지는 것이다.
프라이버시를 해결하기 위해 등장한 영지식증명(ZK-Proof)과 같은 기술은 '정보를 공개하지 않고 유효성을 증명'하는 데는 뛰어나지만, 데이터를 계산하거나 분석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2. 동형 암호의 원리: 암호화된 데이터 위에서 계산하기
동형 암호(HE)는 데이터를 암호화한 상태로 덧셈, 곱셈과 같은 연산을 수행할 수 있는 암호화 기술이다. 기존의 암호화 기술은 데이터를 해독하지 않고는 어떤 연산도 불가능하다. 하지만 동형 암호는 암호화된 데이터 A와 B를 더했을 때, 그 결과 C를 해독하면 A와 B의 원본 데이터를 더한 값과 동일하게 나온다.
- 기술적 원리: 동형 암호는 격자(Lattice)를 이용한 복잡한 수학적 구조를 기반으로 한다. 데이터를 암호화할 때, 연산을 위한 '여백'을 남겨두는 방식이다. 이 여백은 비선형 연산에 취약한 '잡음(Noise)'을 허용하며, 이 잡음을 관리하는 것이 동형 암호의 핵심이다.
- '부분 동형(Partially Homomorphic)' vs. '완전 동형(Fully Homomorphic)':
- 부분 동형 암호: 덧셈이나 곱셈 중 하나의 연산만 무한히 수행할 수 있다. 예를 들어, RSA 암호는 곱셈에 대한 부분 동형성을 가진다.
- 완전 동형 암호(FHE): 덧셈과 곱셈 두 가지 연산을 모두 무한히 수행할 수 있다. 이는 이론적으로 어떤 복잡한 함수라도 암호화된 상태로 계산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2009년 크레이그 젠트리(Craig Gentry)에 의해 처음으로 완전 동형 암호의 가능성이 증명되었고, 이후 기술적 발전이 가속화되었다.
3. 동형 암호와 블록체인의 결합이 가져올 혁신
동형 암호와 블록체인의 결합은 블록체인 기술의 활용 범위를 획기적으로 확장시킬 것이다.
- 프라이버시 강화: 사용자의 민감한 데이터를 암호화하여 블록체인에 기록하고, 필요한 계산은 암호화된 상태 그대로 수행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여러 병원의 의료 데이터를 블록체인에 올리고, 환자의 정보를 공개하지 않은 채로 질병 유병률이나 통계적 분석을 수행할 수 있다.
- 탈중앙화 신원 증명(DID): 사용자의 신용 점수를 암호화하여 블록체인에 기록하고, 대출 프로토콜이 이 데이터를 해독하지 않고도 '신용 점수가 800점 이상'이라는 조건을 검증할 수 있다.
- 기밀 컴퓨팅(Confidential Computing): 기업들은 경쟁사에게 공개하고 싶지 않은 기밀 데이터를 블록체인에 올려 협업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여러 기업이 각자의 매출 데이터를 암호화하여 올리고, 암호화된 상태로 전체 시장 점유율을 계산하는 방식이다.
4. 기술적 도전 과제와 현실화의 길
동형 암호는 이론적으로 매우 강력한 기술이지만, 블록체인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기술적 난제를 해결해야 한다.
- 막대한 연산 비용: 동형 암호화된 데이터를 연산하는 데는 매우 많은 시간과 컴퓨팅 자원이 필요하다. 이는 블록체인의 스마트 컨트랙트 환경에 바로 적용하기에는 비효율적이다.
- 높은 지연 시간: 복잡한 연산에 수십 초 또는 수 분이 소요될 수 있어, 실시간 거래가 중요한 블록체인 환경에는 부적합하다.
- 높은 데이터 확장성: 암호화된 데이터의 크기는 원본 데이터보다 훨씬 커지므로, 블록체인의 데이터 저장 용량 문제를 더욱 심화시킨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연구와 노력이 진행되고 있다.
- 하드웨어 가속기(Hardware Accelerators): 동형 암호 연산에 특화된 칩을 개발하여 연산 속도를 획기적으로 높인다.
- 하이브리드 시스템: 동형 암호를 블록체인 내에서 직접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오프체인(Off-chain)에서 연산을 수행하고 그 결과를 영지식증명으로 증명하여 블록체인에 기록하는 방식이 연구되고 있다. 이는 동형 암호의 복잡한 연산을 외부에서 처리함으로써 블록체인의 효율성을 유지하는 방법이다.
- 특화된 블록체인: 동형 암호에 최적화된 새로운 블록체인을 설계하여, 연산 비용과 지연 시간을 최소화하고자 한다.
5. 동형 암호와 블록체인의 미래
동형 암호는 블록체인 기술이 단순히 금융 거래를 넘어, 데이터 프라이버시가 핵심인 의료, 금융, 정부와 같은 분야로 확장되는 데 필수적인 기술이다. 이는 블록체인의 투명성과 탈중앙화라는 가치를 훼손하지 않고, 개인 정보 보호를 강화하는 혁신적인 해법이다.
동형 암호는 아직 초기 단계의 기술이지만, 영지식증명과 함께 미래 블록체인 프라이버시 기술의 양대 축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두 기술이 상호 보완적으로 발전하여, 사용자들은 데이터의 통제권을 완전히 확보하고, 블록체인 위에서 안전하게 상호 작용하는 미래가 열릴 것이라고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