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공장이 아닌 데이터에서 시작되는 제품
한때 제조업은 거대한 공장과 현장의 인력으로 대표되었다. 엔지니어는 설계도면을 그리고, 생산직은 기계를 조작하며, 모든 정보는 종이 도면이나 스프레드시트 안에서 오갔다. 그러나 지금의 제조업은 다르다.
이제 하나의 제품은 현실의 프로토타입보다 먼저 디지털 공간에서 시뮬레이션된다. 이른바 디지털 트윈(Digital Twin) 시대다.
디지털 트윈은 현실의 사물이나 시스템을 가상의 모델로 구현한 개념이다. 예컨대, 항공기 엔진이나 로봇 팔, 스마트 팩토리 전체 공정을 디지털로 복제해두면, 개발자는 이를 통해 성능 예측, 오류 분석, 유지보수 계획까지 사전 시뮬레이션할 수 있다. 시뮬레이션은 실제 물리적인 값을 가지고 엔지니어링 데이터를 성능데이터를 산출 해낸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물리적인 오류를 줄이고, 생산 효율도 비약적으로 향상된다. 물론 구현을 위해서는 개발, 제조, 애프터마켓의 PLM(Product Life Cysle) 전 과정에 있어 수많은 양질의 데이터와 노하우가 녹아들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이 글에서는 디지털트윈의 활용에 있어 블록체인 적용을 관점으로 살펴 보고자 한다
실제로 GE, Siemens, Bosch 등 글로벌 제조기업은 이미 수많은 기계와 설비를 디지털 트윈으로 관리 중이며, 우리 주변의 자동차, 스마트폰도 이미 이 기술의 혜택을 받고 있다.
2. 디지털 트윈과 현실의 간극 – 문제는 '신뢰성'
그러나 디지털 트윈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는 않는다. 특히 다음 두 가지 문제가 현재 기술의 한계로 부상하고 있다.
첫째, 데이터의 정확성 및 위·변조 문제.
디지털 트윈은 센서와 IoT 기기에서 수집된 데이터를 기반으로 작동한다. 그러나 이 데이터가 누락되거나 조작된다면 트윈 자체가 '가짜'가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설비 상태가 실제로는 위험한데 트윈에는 정상으로 표시된다면, 치명적인 판단 오류로 이어질 수 있다.
둘째, 공급망 관리의 투명성 부족.
제품의 원재료는 어디서 왔고, 누가 어떤 부품을 언제 조립했는지를 정확히 추적하는 일은 여전히 어렵다. 특히 글로벌 공급망이 얽힌 제조업에서는 특정 부품의 품질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이를 신속하게 추적해 리콜하거나 조치하기가 쉽지 않다.
이 두 가지 문제는 결국 '신뢰'의 문제다. 데이터를 신뢰할 수 없다면, 디지털 트윈은 아무리 정밀해도 무용지물이 된다.
3. 블록체인이 가져오는 변화 – 신뢰의 인프라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떠오른 기술이 블록체인(Blockchain)이다.
블록체인은 데이터를 중앙 서버가 아닌 분산된 네트워크에 저장하고, 한 번 기록된 정보를 누구도 임의로 변경할 수 없도록 하는 기술이다. 제조업에서는 다음과 같이 활용 가능하다.
1) 공급망 추적의 투명성 강화
부품이 생산된 공장, 사용된 재료, 품질검사 결과, 운송 경로 등 모든 이력을 블록체인에 기록하면 조작이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자동차 한 대에 들어가는 수천 개의 부품이 어느 벤더에서 언제 제조되었는지를 실시간으로 검증할 수 있게 된다.
2) 디지털 트윈의 무결성 보장
디지털 트윈에 반영되는 센서 데이터나 운영 기록을 블록체인과 연동하면, 중간에 위변조가 불가능해진다. 이로 인해 트윈 모델의 신뢰도가 높아지고, 의사결정의 정확성도 향상된다.
3) 스마트 계약을 통한 자동화
제조업 계약과 납품은 종종 복잡하고 다단계로 진행된다. 블록체인의 스마트 계약 기능을 활용하면, 특정 조건이 충족되었을 때 자동으로 대금이 지급되거나 납품이 승인되도록 할 수 있다. 계약 오류, 지연, 분쟁을 줄이는 효과가 있다.
4. 현실에서의 적용 현황
현재도 블록체인 기반 디지털 트윈 프로젝트는 활발하다.
- Siemens는 블록체인 기반의 디지털 트윈 플랫폼을 활용해 에너지 설비의 운영 데이터를 검증하고 있으며,
- BMW는 자동차 부품의 원산지 추적 시스템에 블록체인을 활용하고 있다.
- 삼성전자도 반도체 생산 공정의 일부를 블록체인 기반 데이터 검증 시스템으로 전환 중이라고 알려져 있다.
다만, 이 모든 기술이 실시간 대규모 제조현장에 적용되기 위해서는 여전히 다음과 같은 과제가 있다.
1) 처리속도 문제
블록체인은 본질적으로 데이터를 순차적으로 처리하므로, 수많은 센서 데이터를 초당 수천 건 이상 처리해야 하는 대형 공장에는 아직 성능 한계가 있다.
2)시스템 통합 문제
기존 ERP, MES 시스템과 블록체인 플랫폼을 어떻게 통합할 것인지도 큰 과제다. 제조현장은 복잡한 IT 환경을 이미 갖추고 있어 블록체인을 이식하는 것이 간단하지 않다.
5. 미래의 제조 – '디지털 신뢰'가 경쟁력
앞으로의 제조업은 단순히 공정을 자동화하는 수준을 넘어, 데이터 기반의 예측과 신뢰가 중심이 될 것이다.
디지털 트윈은 더 이상 모형이 아닌 ‘또 하나의 현실’로 진화하고 있고, 블록체인은 그 현실을 ‘믿을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준다.
예를 들어, 향후 전기차 제조업체는 배터리의 모든 생애주기 데이터를 디지털 트윈+블록체인 조합으로 추적할 수 있다. 고객은 앱을 통해 내가 구매한 차량의 배터리가 어떤 광산에서 추출된 리튬을 사용했는지, 탄소 배출량은 얼마였는지를 확인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전 세계의 협력사가 동시에 제품 개발에 참여하더라도, 블록체인 기반의 기록과 스마트 계약 덕분에 신뢰 기반 협업이 가능하다. 이는 중소기업에게도 글로벌 진출의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마치며
제조업은 여전히 무겁고 거대한 산업처럼 느껴지지만, 그 속은 점점 더 정밀한 데이터와 신뢰 기술로 채워지고 있다.
디지털 트윈이 제조의 모든 것을 예측 가능한 시뮬레이션으로 만들고, 블록체인이 그 시뮬레이션을 믿을 수 있게 만든다.
그리고 이 두 기술의 융합은 단지 '효율'을 넘어서, 인간과 기술이 함께 만드는 지속 가능한 산업 생태계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미래의 공장은 더는 소음과 먼지로 가득한 공간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것은 어쩌면, 신뢰와 데이터가 오가는 조용한 네트워크의 집합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