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디지털 자산, 죽음을 넘는가?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남겨진 것은 유품만이 아니다. 지금 우리는 생전에 남긴 디지털 흔적과 자산도 함께 마주하게 된다. 그중에서도 블록체인 기반의 자산(암호화폐, NFT, DAO 지분, 디지털 월렛)은 전통적인 상속 체계와 완전히 다른 문제를 던진다.
은행 계좌는 사망 신고와 함께 상속 절차가 진행된다. 그러나 시드 구문(seed phrase:암호화폐 지갑 생성 시 제공되는단어들의 조합으로, 지갑복구와 관련된 모든 키를 생성할 수 있는 마스터키 역할), 개인지갑, 멀티시그(Multisig:2개 이상 서명필요) 키, 그리고 NFT로 남은 유산은 고인의 죽음과 함께 그 존재를 잃을 수도, 혹은 누구도 열지 못한 채 블록에 남아버릴 수도 있다.
이제 우리는 묻게 된다.
"사람은 죽어도 지갑은 남는다. 그렇다면, 이 지갑 안의 자산은 누구의 것인가?"
2. 블록체인 유산의 구성 요소들
디지털 유산이란 단순히 비트코인만을 뜻하지 않는다. 오늘날 블록체인 생태계에서 상속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주요 자산은 다음과 같다.
- 암호화폐: BTC, ETH, SOL 등 개인 지갑에 보관된 디지털 자산
- NFT: 예술 작품, 게임 아이템, 부동산 권한 등 다양한 디지털 소유권
- DAO 지분: 탈중앙화 자율조직에 기여한 이력과 그에 따른 권한
- 디지털 유산 지갑: 자동화된 스마트컨트랙트 기반의 자산 이전 설정
- 메타버스 자산: 가상세계 속 부동산, 아이템, 커뮤니티 통제권
이 모든 자산은 ‘암호화된 키’에 의해 접근이 제한된다. 결국 “키를 가진 자가 자산을 가진 자”라는 블록체인의 원칙이 상속 문제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3. 죽음 앞에서 무력해지는 탈중앙
블록체인의 가장 큰 강점은 ‘탈중앙’이다. 하지만 죽음이라는 ‘예외적 상황’ 앞에서는 이 탈중앙성이 오히려 극단적인 취약성으로 바뀐다.
- 비밀키를 유족이 모르면? : 자산은 영원히 접근 불가. 영구 동결된 채 블록체인 상에서 잊힌다.
- 고인이 생전에 남긴 NFT가 불법 복제된 경우? : 법적 대응 주체가 없으면 창작물의 권리 보호도 어렵다.
- 유족 간 분쟁이 생기면? : 자산 자체는 누구 소유인지 알 수 있어도, 지갑 접근이 불가능하면 소송 의미 없음.
탈중앙화된 자산은 국가나 기관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적다. 이로 인해 상속은 전통적 법체계와 완전히 충돌하게 된다.
4. 유산인가, 아니면 무주물(주인이 정해지지 않은 물건)인가?
전통적으로 상속은 ‘재산권’에 대한 법적 절차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암호화폐는 익명성, 비인가성, 탈중앙성이라는 특성 때문에 법적 관할의 공백 상태에 있다.
- 현행 민법상 상속 대상이 되는가? : 원칙적으로 디지털 자산도 상속 대상이지만, 접근성 확보가 법적 조건이다.
- 프라이빗 키도 유산인가? : 키 자체는 ‘자산에 대한 접근 수단’일 뿐, 법적으로는 모호하다.
- NFT는 물건인가? 저작권인가? : NFT는 코드와 링크로 구성된 토큰이며, 그 자체가 저작권은 아니다. 따라서 상속과 저작권 이전 간의 법적 괴리가 발생한다.
결국 오늘날의 법은 디지털 자산을 소유권의 관점으로만 보기에 너무 전통적이며, 블록체인의 기술적 특성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5. 실제 대응 사례와 서비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시도는 이미 시작되었다.
블록체인 업계에서는 ‘디지털 유언장’, ‘상속 설정형 지갑’이라는 개념이 등장했다.
- SmartWill 서비스 : 사용자가 미리 지정한 조건(예: 지갑 비활성 12개월)을 충족하면, 자산이 특정 주소로 자동 이전되는 스마트컨트랙트
- 멀티시그 기반 유산 시스템: 고인, 유언 집행인, 상속인이 각각의 키를 가진 상태에서 다수 합의 시 자산 이전 가능
- NFT 신탁: NFT를 제3의 지갑(예: 법률 대리인)으로 이전하고, 상속 여부를 법적 판결로 결정하는 구조
이러한 서비스들은 아직까지는 기술적 실험 또는 법적 테스트 단계에 머물러 있다. 어떤 국가도 이를 완전히 제도화하지 않았으며, 실제 사망 사건에서 작동한 사례는 극히 드물다.
6. 기억, 책임, 관계의 변화
디지털 유산은 단지 경제적 자산이 아니다. 사회학적으로는 기억의 보존, 정체성의 흔적, 관계의 잔여물로 간주된다.
- NFT로 남겨진 예술 작품은 고인의 철학과 미감을 대변하는 문화적 유산일 수 있다.
- DAO에서의 활동 이력은 공동체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보여주는 사회적 족적이다.
- 메타버스 부동산은 단순한 가상재산이 아니라, 고인이 ‘살았던 공간’으로 기억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어떻게 다뤄야 할까? 유족은 삭제할 수 없는 이 디지털 흔적 앞에서 오히려 더 큰 책임을 느낄 수 있다. 블록체인 기술이 제공한 ‘영원함’의 속성은 사랑과 애도에도 새로운 방식을 요구한다.
7. 미래의 전망: 법과 기술의 중간지대가 필요하다
앞으로 블록체인 자산은 점점 더 보편화될 것이다. 암호화폐뿐 아니라, 온체인 주식, 디지털 토지, AI 저작물 등 새로운 자산들이 계속 등장한다. 이에 따라 다음과 같은 변화가 예상된다.
- 국가 단위의 디지털 유산 가이드라인 마련: 디지털 자산 상속의 절차, 신고 기준, 세금 처리 등 법제화
- 법률 기반 스마트컨트랙트: 유언장과 법적 계약이 자동화된 코드로 구현되는 혼합형 시스템
- AI 유언 집행자: 고인의 의사를 분석하고 블록체인 상에서 상속 구조를 조정하는 지능형 대리 시스템
- 공공 블록체인 기반 유산 기록소: 위·변조 불가능한 유언과 상속 기록 보관소 등장
하지만 기술이 앞서가더라도, 여전히 핵심은 “누가 책임질 것인가”라는 법적·윤리적 질문에 있다. 블록체인의 영원함은 편리함이 아닌 책임의 무게를 동반한다.
8. 죽음 이후에도 계속되는 ‘접속’
사람은 죽는다. 하지만 블록체인은 남는다. 문제는 우리가 무엇을 남기고, 누가 그것을 이어받을 것인가이다. 암호화폐는 자유를 가져왔지만, 죽음 앞에서는 책임도 함께 요구한다.
지금은 아직 정리되지 않은 ‘디지털 유산의 황무지’일지 모르지만, 곧 우리는 이 세계 속에서 상속도, 이별도, 기억도 온체인화되는 사회를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는 떠났지만, 그의 지갑은 아직 살아 있다. 그리고 그 안의 NFT는 말이 없지만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