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호화폐 시장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 중 하나인 "과연 암호화폐는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비트코인부터 시작해 수많은 알트코인이 쏟아져 나오면서, 이들을 단순한 '코인'이라는 이름으로 묶는 것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이들이 가진 기술적, 경제적 특성에 따라 법적 지위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 글을 통해 우리는 국제적인 기준을 바탕으로 코인을 분류하는 방법을 알아보고, 이것이 법률과 규제에 어떻게 연결되는지 심층적으로 탐구해 보고자 한다.
1. 왜 분류하는가? – 불확실성과의 싸움
초기 암호화폐 시장은 규제와 법률의 경계가 모호한 ‘와일드 웨스트(Wild West)’와 같았다. 누구나 쉽게 코인을 발행하고 판매하는 ICO(Initial Coin Offering)가 성행하면서, 투자자들은 제대로 된 정보 없이 투기에 나섰고, 이는 수많은 사기와 투자자 피해로 이어졌다.
각국 규제 당국은 이러한 혼란을 막고 투자자를 보호하며, 자금세탁과 같은 불법 행위를 방지하기 위한 기준을 마련해야 했다. 그러나 모든 암호화폐를 동일하게 규제할 수는 없다. 단순히 결제에만 사용되는 코인과 특정 회사의 지분을 나타내는 코인을 같은 잣대로 규제하는 것은 불합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암호화폐의 기능적 특성에 따라 명확하게 분류하는 작업이 필수적이었다.
이러한 분류 작업에 있어 선도적인 역할을 한 기관이 바로 스위스 금융시장감독청(FINMA)이다. FINMA의 가이드라인은 전 세계 많은 국가의 규제 당국이 참고하는 기준이 되었다.
2. 스위스 FINMA의 선도적 가이드라인: 3가지 유형
스위스 FINMA는 2018년, 암호화폐를 기능에 따라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하는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이 분류는 기술적인 용어 대신 ‘토큰이 무엇을 위해 사용되는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2.1. 지급형 토큰 (Payment Tokens)
지급형 토큰은 상품이나 서비스의 결제 수단으로 사용될 목적으로 만들어진 암호화폐다. 화폐의 기능인 교환의 매개 역할을 수행한다.
- 특징:
- 유동성이 높고 가격 변동성이 낮아야 한다.
- 특정 프로젝트나 기업과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다.
- 대표적인 예시: 비트코인(Bitcoin), 라이트코인(Litecoin)
- 규제:
- FINMA는 지급형 토큰을 ‘화폐 또는 외환’으로 간주하며, 주로 자금세탁 방지(AML) 관련 규제를 적용한다. 거래소는 고객의 신원을 확인하고(KYC) 의심 거래를 보고해야 한다.
2.2. 유틸리티 토큰 (Utility Tokens)
유틸리티 토큰은 특정 플랫폼이나 서비스에 접근하고 사용하는 데 필요한 ‘이용권’ 또는 ‘쿠폰’과 같다. 토큰 보유자는 해당 서비스의 기능을 이용할 권리를 가진다.
- 특징:
- 프로젝트의 기술적 인프라 위에서 사용된다.
- 토큰 자체가 가치 저장 수단이 아닌, 특정 기능을 사용하기 위한 수단이다.
- 대표적인 예시: 이더리움(Ethereum)의 가스비, 파일코인(Filecoin)의 스토리지 이용권
- 규제:
- FINMA는 유틸리티 토큰을 발행하는 행위를 특별히 증권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하지만, 토큰의 기능 외에 투자 목적을 부각할 경우, 아래의 증권형 토큰으로 분류될 가능성이 있다.
2.3. 자산형 토큰 (Asset Tokens)
자산형 토큰은 현실 세계의 자산(부동산, 주식, 채권 등)을 블록체인 위에 토큰화한 것이다. 이는 특정 기업의 지분, 배당금 청구권, 혹은 미래 수익에 대한 권리를 나타낸다. 전통적인 증권(Security)과 유사한 성격을 가진다.
- 특징:
- 투자 상품의 성격을 가진다.
- 배당금, 이자, 수익 분배 등 특정 경제적 권리를 부여한다.
- 대표적인 예시: 특정 회사의 지분을 나타내는 증권형 토큰(Security Token)
- 규제:
- FINMA는 자산형 토큰을 ‘증권’으로 간주하며, 증권법에 따라 엄격한 규제를 적용한다. 이는 발행, 판매, 거래 등 모든 단계에 걸쳐 투자자 보호를 위한 공시 의무가 따른다.
3. 법률적 잣대: 증권과 화폐의 경계
FINMA의 분류는 암호화폐를 이해하는 중요한 틀을 제공하며, 이는 각국의 법률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3.1. 증권거래법과 ‘하위 테스트(Howey Test)’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는 암호화폐를 증권으로 분류할 때 ‘하위 테스트(Howey Test)’를 적용한다. 이는 1946년 대법원 판례에서 비롯된 기준으로, 투자 계약(Investment Contract)을 판단하는 네 가지 기준을 제시한다.
- 금전의 투자(Investment of Money): 투자자가 금전(또는 기타 가치)을 투자하는가?
- 공동의 사업(Common Enterprise): 투자자들의 돈이 하나의 공동 사업에 모이는가?
- 수익 기대(Expectation of Profit): 투자자들이 수익을 기대하는가?
- 타인의 노력(Efforts of Others): 그 수익이 발행자 또는 제3자의 노력으로 발생하는가?
만약 어떤 토큰이 이 네 가지 기준을 모두 만족한다면, 그 토큰은 ‘증권’으로 간주된다. 이더리움은 ICO 당시 이 기준을 만족했지만, 현재는 탈중앙화가 상당 부분 진행되어 SEC로부터 증권이 아니라고 분류되었다. 반면 리플(XRP)은 SEC와 ‘증권성’ 여부를 놓고 긴 법적 공방을 벌이고 있다.
3.2. 자금세탁방지(AML)법
암호화폐 거래소와 금융기관들은 자금세탁방지법(AML, Anti-Money Laundering)의 규제를 받는다. 이는 코인의 법적 분류와 관계없이 적용된다. 거래소는 고객의 신원을 확인하고(KYC), 의심스러운 거래를 금융정보분석원(FIU)에 보고해야 한다. 이는 코인이 범죄에 악용되는 것을 막기 위한 필수적인 장치다.
4. 증권형 토큰(STO)의 규제와 의미
자산형 토큰의 법적 분류는 증권형 토큰(STO, Security Token Offering)이라는 새로운 시장을 탄생시켰다. STO는 기존의 ICO와 달리, 증권법의 규제를 준수하며 토큰을 발행하는 방식이다.
- 규제:
- 공시 의무: 발행자는 투자자에게 사업 계획, 재무 상태 등 필수적인 정보를 공개해야 한다.
- 투자자 자격 제한: 일반 투자자가 아닌, 공인된 전문 투자자에게만 판매를 허용하는 등 투자자 보호를 위한 제한이 따른다.
- 의미:
- 전통 자산의 토큰화: 부동산, 미술품 등 실물 자산을 소액으로 나누어 블록체인 위에서 거래할 수 있게 한다. 이는 투자 접근성을 높이고, 자산의 유동성을 확보하는 데 기여한다.
- 안정성과 투명성: ICO의 무분별한 발행과 달리, STO는 법적 보호를 받으므로 투자자에게 높은 신뢰를 제공한다.
5. 미래 전망: 규제와 혁신의 공존
암호화폐의 법적 분류와 규제는 블록체인 산업의 건전한 성장을 위해 필수적이다. 무분별한 투기와 사기를 막고, 투자자를 보호하는 것은 시장의 신뢰를 구축하는 가장 중요한 과정이다. 미래에는 법적 분류에 따라 각기 다른 규제를 받는 다층적인 암호화폐 시장이 형성될 것이다.
- 지급형 토큰: 화폐의 역할을 수행하며, 주로 자금세탁방지 규제를 받는다.
- 유틸리티 토큰: 플랫폼의 이용권으로 기능하며, 서비스의 기능과 효율성을 중심으로 평가받는다.
- 증권형 토큰: 증권법의 엄격한 규제 아래, 전통 금융 시장과 블록체인 기술을 융합하는 새로운 투자 상품으로 자리 잡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코인들은 더 이상 ‘하나의 종류’가 아니다. 이들을 명확하게 분류하고 규제하는 것은 블록체인 기술이 단순한 투기 수단을 넘어, 우리 사회의 중요한 인프라로 자리 잡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