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조직을 만든 이유
인간은 본래 혼자 살 수 없는 존재다. 언어를 통해 뜻을 나누고, 제도를 통해 삶을 조직하며, 협업을 통해 미래를 설계한다. 역사상 모든 사회는 인간이 ‘함께 살아가기 위해 만든 구조물’ 위에 존재해왔다.
그중에서도 ‘회사’는 근대 이후 등장한, 가장 강력한 조직 형태다. 우리는 회사를 통해 노동하고, 소득을 얻고, 사회적 소속감을 느낀다. 회사는 우리 삶의 리듬이자, 자아의 일부다.
그런데 만약 이 조직이 이제 사라진다면, 혹은 완전히 다른 형태로 대체된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게 될까?
회사: 근대적 인간이 만든 최고의 구조물
회사는 단순히 고용과 임금의 장소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삶을 조직화하는 하나의 세계관이었다.
17세기 동인도회사에서 시작해, 산업혁명기의 대규모 공장, 20세기의 복지 기업, 그리고 오늘날의 글로벌 테크기업까지.
회사는 다음의 역할을 해왔다:
- 삶을 계획하게 해주는 구조
- 시간과 노동을 교환하는 계약
- 관계를 맺게 하는 커뮤니티
- 신분과 계급을 정하는 표지
우리는 회사에서 ‘일’뿐 아니라 ‘의미’를 얻었다. 출근하는 자아, 회식하는 공동체, 평가받는 나, 승진을 꿈꾸는 인간.
회사는 단순한 조직을 넘어 정체성과 가치의 거대한 플랫폼이었던 셈이다.
균열의 징후들
하지만 오늘날, 기술의 발전과 사회의 변화로 인하여 회사라는 제도는 점차 피로와 의문에 직면하고 있다.
노동의 유연성이 사라지고, 위계가 창의성을 억누르며, 노동과 보상이 정직하게 연결되지 않는 구조가 되었다.
우리는 묻는다.
"왜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자리에, 같은 사람들과 일해야 하는가?"
"일을 하면서 왜 이토록 고립되고 통제받는가?"
"왜 이익은 회사에 남고, 리스크는 나에게 돌아오는가?"
그리고 이 질문들은 더 큰 물음을 낳는다.
우리는 정말 ‘회사가 있어야만’ 협업하고, 창의적으로 일하고, 경제적 보상을 얻을 수 있는가?
기술이 제안하는 대안: DAO
DAO(Decentralized Autonomous Organization)는 이 질문에 가장 극단적이면서도 근본적인 대답을 내놓는다.
중앙 관리자 없이, 코드와 합의만으로 움직이는 조직.
조직의 ‘의미’가 아니라 ‘형태’부터 바꿔버리는 급진적인 상상이다.
DAO는 다음과 같은 구조를 가진다:
- 중앙 관리자 없음: 모든 의사결정은 투표와 스마트 계약을 통해 자동 실행
- 기여 기반 보상: 직급이 아닌 실제 작업량이나 영향력에 따라 토큰 지급
- 거버넌스 참여: 모든 구성원은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지님
- 완전한 투명성: 모든 활동과 기록은 블록체인 상에 공개됨
이는 기술이 아니라, 노동의 사회적 의미와 권력 구조에 대한 철학적 실험이기도 하다.
새로운 사회계약의 실험
전통적인 고용 모델은 신뢰 기반이었다.
회사와의 계약, 상사의 평가, 조직의 문화 등은 불완전한 인간적 관계 안에서 작동했다.
반면 DAO는 코드와 합의에 의한 계약을 만든다.
신뢰는 자동화되고, 권한은 분산된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더 이상 '회사에 고용된 개인'이 아니라,
'프로젝트에 기여하고 보상받는 자유인'으로 위치하게 된다.
DAO는 말한다.
"조직은 사람을 통제하지 않아도 운영될 수 있다.
조직은 계급 없이도 기여로 보상할 수 있다."
이는 일종의 새로운 사회계약 이론이다. 인간은 자율적으로 일하고, 함께 결정하며, 결과를 공유하는 공동체를 스스로 구성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원하는가?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노동은 생존을 위한 활동이고, 일(Work)은 세상을 만드는 창조 행위"라고 말했다.
DAO가 바꾸려는 것은 이 두 가지를 기술적으로 구분하고, 인간에게 창조의 여지를 더 주는 구조다.
전통적 회사에서는 ‘임금’을 받기 위해 ‘노동’을 제공했다.
그러나 DAO에서는 ‘기여’를 통해 ‘보상’과 ‘거버넌스 참여’를 얻는다.
이 구조는 인간에게 더 자율성, 주도성, 창조성을 부여할 가능성을 열어준다.
지금, 세상은 어디쯤 와 있는가?
현실적으로 DAO는 아직 걸음마 단계지만, 그 실험은 분명히 시작되었다.
- Gitcoin DAO는 오픈소스 개발자들에게 작업 보상을 제공하고
- Bankless DAO는 미디어, 교육, 커뮤니티를 구성하며
- Friends With Benefits는 예술, 도시, 콘텐츠를 중심으로 DAO형 커뮤니티를 운영한다
이들은 모두 중앙 없는 협업, 기여 기반 인센티브, 투명한 거버넌스라는 구조를 유지하면서,
새로운 ‘일의 풍경’을 그리고 있다.
DAO 이후의 인간은 어떤 존재일까?
만약 DAO가 회사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면, 인간은 다음과 같이 변화할 수 있다:
- 고용된 인간에서 → 참여하는 인간으로
- 계급에 속한 자아에서 → 자율적 협력자로
- 생존을 위해 일하는 노동자에서 → 의미를 만드는 창작자로
이는 곧 삶의 리듬 자체가 달라진다는 말이다.
출퇴근이 사라지고, 상사가 없으며, 보상은 토큰 지갑으로 들어오고, 결정은 커뮤니티와 함께 한다.
DAO는 기술이 만들어낸 구조물이지만, 그 핵심은 오히려 인문학적인 질문이다:
우리는 누구와, 왜, 어떻게 협력하며 살고 싶은가?
조직의 끝에서 조직을 다시 상상하다
회사는 분명 근대사회의 영광이자 그림자였다.
우리는 그 덕분에 자아를 찾았지만, 때론 자아를 잃기도 했다.
DAO는 이 조직의 한계를 보완하려는 시도이자,
미래의 사회 조직 모델을 처음부터 다시 설계해보려는 실험이다.
물론 DAO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진 못할 것이다.
갈등은 여전히 존재하고, 사람은 완전하지 않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는 지금 '회사'의 시대를 넘어,
협력의 새로운 형식을 찾아 나서는 중이라는 점이다.
DAO는 단지 기술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어떤 관계를 맺고, 어떤 의미로 살아갈지를 묻는
가장 철학적인 질문이기도 하다.